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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19일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3선개헌 반대 시국 대연설회에서 김대중 당시 신민당 대변인이 '3선개헌은 국체의 변형이다'라는 제목으로 연설하고 있다. 그는 3선개헌이 박정희 영구집권과 1인 독재를 획책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박정희와 김대중<14>
1967년 6월 8일 치러진 제7대 총선은 4‧19 혁명으로 이어진 3‧15 부정선거 못지않은 전면적 부정선거였다. 김대중은 전남 목포에서 박정희의 전폭적 지원 속에 진행된 관권·금권 선거를 검증완료릴게임 이겨내고 당선됐지만, 전국적으로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압승이었다. 민주공화당은 지역구 102석에 전국구 27석을 더해 129석을 얻어 개헌선인 3분의 2 이상 의석(117석)을 훌쩍 넘겼다. 제1야당 신민당의 의석수는 45석(지역구 28석, 전국구 17석)에 그쳐 6대 국회 65석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신민당은 서울 13석, 부산 5 게임몰 석 등 대도시에서는 선전했으나 유령 유권자 조작에다 막걸리와 고무신 선거가 난무한 농어촌에서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농어촌 지역을 중심으로 부정선거가 대대적으로 벌어진 결과였다.
"6·8총선은 유례없는 부정선거"...전국적인 규탄시위에 공화당도 당황
신민당은 6‧8 총선을 유례없는 부정선거로 규정하 바다이야기2 고 전면 재선거를 요구하며 국회 등원을 거부했다. 대학가와 중·고등학교까지 학생들의 규탄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주요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일부 학교에서는 조기 방학을 해야 할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다.
야당의 기세와 부정선거 규탄 여론에 당황한 집권 여당은 15~20개 의석을 자발적으로 내놓겠다는 등의 수습책을 제시했다. 신민당 오션파라다이스예시 대변인을 맡고 있던 김대중은 당 총재인 유진오 박사에게 여당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강력히 요청했다. 그리고 이참에 지방자치제 실시 약속을 받아낼 것도 건의했다. 유 총재는 이에 긍정적이었고, 김대중은 당 대변인 자격으로 여당 제안을 수용할 뜻을 밝혔다.
유진오(오른쪽) 신민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 당 총재가 안국동 자택에서 고여문(왼쪽) 사무처장, 김대중(가운데) 대변인 등 당직자들과 '대여투쟁'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러나 다음날 신민당 내 강경파는 여당의 제안을 거부하고 6‧8 선거의 전면 무효화와 재선거 요구를 내걸고 장외투쟁을 계속하기로 했다. 강경파의 명분론에 실리를 취하자는 목소리가 밀린 것이다. 하지만 여야의 대치가 길어지자 국민 여론은 양측을 가리지 않고 국회의 무책임을 질타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결국 야당은 여당이 제시한 타협안을 받아들여야 했는데, 그 내용은 보잘 것 없었다. 부정선거에 대한 대통령 사과는 유감 표명으로 대신했고, 부정이 심했던 선거구의 재선거 등은 국회 내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처리한다는 정도에 그쳤다. 야당은 선거 후 174일, 약 5개월 만에 등원해 국회를 정상화했다(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1’).
"15~20개 의석 내놓겠다"는 공화당...김대중은 받아들이자 했으나 강경파 반대
공화당은 부정선거 뒤처리로 10명을 제명 조치했다. 공화당에서 제명된 의원들 가운데 1명은 의원직을 내려놓고 정계를 은퇴했지만, 나머지는 ‘10‧5구락부’를 결성해 활동하다가 3선 개헌 국면의 어수선한 시기에 은근슬쩍 민주공화당으로 복당했다.
신민당이 김대중의 의견대로 15~20개 의석을 내놓겠다는 공화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상황은 신민당에 훨씬 유리해졌을 것이다.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강경한 것이 겉으로는 선명해 보이지만 때로는 한없이 무책임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김대중, 앞의 책).
부정선거 문제에 대한 박정희의 입장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거 4일 후인 6월 12일, 박정희는 정일권 국무총리와 김종필 공화당 의장에게 “얼마간의 의석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공화당원에 의해 저질러진 선거부정 사건은 엄격하게 다스려야 한다”면서 철저한 사후 처리를 지시했다. 6월 16일에는 특별 담화를 통해 “선거 부정은 마땅히 규탄 받아야 하며, 민주 시민은 이를 규탄해야 한다”, “정부도 국민과 함께 이를 분개하고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조갑제, ‘박정희 9’).
박정희 "흑색선전 속임수로 선거 치르는 사람 있다"
법조인 출신으로 민주공화당 창당 과정에 참여해 초대 총재를 지냈던 정구영의 회고록 ‘실패한 도전’에는 6‧8 부정선거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부정선거 사태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수습책을 건의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다.
정구영 전 공화당 총재. 그는 회고록에서 부정선거로 얼룩진 1967년 7대 총선과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이 몇몇 사람이 국회에 들어오지 못하기를 바라서 그 지역의 공화당 후보를 특별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공개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제가 이번 선거에서 몇 사람은 국회에 들어오지 못하기를 바라서 특히 그 지역의 공화당 후보를 특별 지원했습니다. 그 몇 사람은 내게 반대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6대 국회 4년 동안 보니 그 사람들은 이면에서 뒷거래 등을 통해 실속을 챙깁니다. (중략) 소위 마타도어 작전이라 해서 속임수 선거를 도처에서 했습니다. 김○○ 같은 사람이 한 선거운동은 온통 마타도어 흑색선전입니다.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잔꾀와 속임수로 선거를 치릅니다.”
(‘정구영 회고록-실패한 도전’, 이영석 편, 중앙일보사, 1987)
박정희가 ‘국회에 들어오지 못하기를 바라서’ 그 지역의 공화당 후보를 특별 지원한 ‘그 몇 사람’ 중에는 김대중도 포함됐다. 특히 ‘온통 마타도어 흑색선전’이라고 한 부분은 명백히 김대중을 겨냥한 것이다.
중앙정보부, '선거판의 여우'로 불린 김대중 비서 회유해 배신하도록 만들다
김대중의 마타도어 흑색선전 선거운동 배경에는 엄창록이라는 인물이 있다. 함경북도 경성군 태생인 그는 6‧25 전쟁 와중에 월남해 강원 인제에 정착해 살다가 1961년 인제 보궐선거 당시 김대중의 비서로 합류했다. 이후 신출귀몰한 꾀로 인제 보선, 1963년 6대 총선(목포), 1967년 7대 총선(목포)에서 김대중 당선에 공을 세웠다. ‘선거판의 여우’라고 불린 그는 집권여당의 관권·금권 선거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마타도어 흑색선전과 같은 술책이 불가피하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김대중의 비서로 '선거판의 여우'로 불렸던 엄창록. 그는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중앙정보부의 회유를 받아 김대중 곁을 떠났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당시 중앙정보부가 엄창록의 선거술책을 수집해 소책자를 만들어 은밀히 돌려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중앙정보부는 엄창록을 김대중 곁에 두고 선거를 치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집중적으로 회유해 김대중을 배신하도록 만들었다. 1971년 대선 과정에서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지역감정 조장이 극심했는데, 권노갑 등 김대중 측 참모들은 여권으로 넘어간 엄창록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했다(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폴리티쿠스, 2012).
정구영 회고록에서 보듯 김대중에 대한 박정희의 부정적 인식은 7대 총선을 거치면서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이 3선 개헌 반대운동에 앞장서자 그에 대한 박정희의 부정적 인식은 더욱 굳어졌을 것이다.
박정희는 7대 총선 당시 김대중 후보가 3선 개헌 가능성을 거론하자 단호하게 부인한 바 있다. 1968년 청와대에서 신민당 김상현 의원과 단독 면담을 하는 자리에서도 3선 개헌 등 장기집권 문제가 나오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내가 장기 집권을 하거나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한다면 야당이 극한투쟁을 해도 좋습니다. 내 임기가 3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만약 장기 집권한다면 김 형이 극한투쟁에 앞장서시오.”(조갑제, 앞의 책)
3선 개헌 둘러싼 공화당 내 권력투쟁
박정희의 이런 입장과는 달리 3선 개헌 추진 움직임은 1966년 1월 공화당 당직 개편에서 반JP(김종필) 4인 체제가 들어서면서 시작됐다는 견해가 많다. 4인 체제는 김성곤 국회 재정위원장 겸 당 재정위원장, 길재호 사무총장, 백남억 재정위원장, 김진만 원내총무 등을 일컫는다. 이들은 2차 외유 직전 공화당 의장직에서 물러난 지 1년 6개월 만에 다시 당의장으로 복귀한 김종필을 집중 견제했다. 3선 개헌 없이 1971년에 대선이 치러진다면 김종필이 가장 유력한 공화당 후보였고, 여권 내 3선 개헌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김종필(왼쪽) 국무총리가 백남억(오른쪽) 공화당 의장과 대화하고 있다. 이 두사람은 3선 개헌을 두고 공화당 내에서 서로 대립하게 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68년 5월에는 김종필이 국회의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을 포기하고 물러나게 된 ‘한국국민복지회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앞서 언급한 4인 체제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 포함된 ‘6인방’이 공동으로 꾸민 작품이었다. 내용은 김종필 측근인 김용태 의원이 사조직을 만들어 ‘박정희 3선 개헌 공작을 저지해야 하며 1971년 대선에서 우리의 대안은 김종필이다’라는 시국판단서에 서명했다는 것이었다. 김종필은 청와대로 두 차례 찾아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해명했지만, 박정희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보고서를 내밀며 진상을 추궁했다고 한다(김종필, ‘김종필 증언록’, 와이즈베리, 2016).
결국 이 사건으로 김종필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칩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화당 내에서는 3선 개헌을 추진하는 당 지도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구영 의원을 중심으로 한 구주류는 개헌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세력을 규합했고, 이른바 ‘4‧8 항명’으로 실력을 드러냈다. 야당이 제출한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 표결에서 공화당 의원 40명이 찬성표를 던져 가결된 것이다. 이는 박정희 집권 이후 최초의 집단적 항명 사태였다.
김종필 불러 "3선 개헌 도와달라" 호소한 박정희
공화당은 개헌 반대파의 핵심으로 항명을 주도한 양순직·예춘호·박종태·정태성·김달수 의원 등 5명을 제명했다. 그럼에도 공화당 내 3선 개헌 반대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박정희는 칩거 중인 김종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김종필을 청와대로 불러 “임자밖에 없어. 임자가 날 도와야지 누가 날 도울 거야. 날 도와주고 조금 남은 일 더 하게 해줘. 이번 한 기만 더 하겠다는 건데, 그것도 안 되겠어?”라고 호소했다. “같이 죽자고 혁명 해놓고, 혼자 살려고 그래? 1960년대엔 빈곤을 겨우 퇴치했는데, 1970년대엔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할 것 아니야. 이 길을 같이 가자”고도 했다. 김종필은 “대통령의 눈에 눈물까지 글썽였다”고 회고했다.
※ 이 기사는 한국일보의 프리미엄 기사입니다. 더 자세한 기사 내용은 한국일보닷컴에서 로그인 후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 링크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으세요.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32515120003790
박정희와 김대중
① 자유당의 방해로 후보 등록 실패...분노한 김대중은 박정희의 부대를 찾아갔다
② "김대중은 공산주의자" 흑색선전 뚫고 첫 당선...그러나 이틀 뒤 쿠데타가 일어났다
③ 박정희 유신 선포 때 일본 머물던 김대중…1년 전의 교통사고로 체포·고문 면했다
④ "실로 나라가 위중합니다" 김대중의 간곡한 제안, 박정희는 끝내 거절했다
⑤ 김대중 “내 어머니는 둘째부인”…누나 젖먹고 큰 ‘늦둥이’ 박정희
⑥ 체구 작았지만 공부 잘한 '악바리'...박정희는 나이 많은 급우들의 뺨도 때렸다
⑦ 성적 ‘꼴찌그룹’ 박정희와 대학 진학 포기한 김대중…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⑧ 물에 빠진 여학생 구한 교사 박정희...목포서 지프 몰던 사업가 김대중
⑨ 나이 많아 만주군관학교 입학할 수 없었던 박정희...혈서를 써보냈다
⑩ 전쟁 탓에 목포 떠나 부산에서 사업한 김대중, 그곳에서 대학생 이희호 만나다
⑪ 박정희·김대중 모두 좌익으로 몰렸던 이유는...1946년 대구의 그날
⑫ 박정희가 추진한 한일국교정상화...'변절자'로 몰렸지만 "필요하다" 소신 밝힌 김대중
⑬ "반드시 낙선시켜라" 박정희 엄명이 '정계 거물' 김대중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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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박정희와 김대중<14>
1967년 6월 8일 치러진 제7대 총선은 4‧19 혁명으로 이어진 3‧15 부정선거 못지않은 전면적 부정선거였다. 김대중은 전남 목포에서 박정희의 전폭적 지원 속에 진행된 관권·금권 선거를 검증완료릴게임 이겨내고 당선됐지만, 전국적으로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압승이었다. 민주공화당은 지역구 102석에 전국구 27석을 더해 129석을 얻어 개헌선인 3분의 2 이상 의석(117석)을 훌쩍 넘겼다. 제1야당 신민당의 의석수는 45석(지역구 28석, 전국구 17석)에 그쳐 6대 국회 65석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신민당은 서울 13석, 부산 5 게임몰 석 등 대도시에서는 선전했으나 유령 유권자 조작에다 막걸리와 고무신 선거가 난무한 농어촌에서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농어촌 지역을 중심으로 부정선거가 대대적으로 벌어진 결과였다.
"6·8총선은 유례없는 부정선거"...전국적인 규탄시위에 공화당도 당황
신민당은 6‧8 총선을 유례없는 부정선거로 규정하 바다이야기2 고 전면 재선거를 요구하며 국회 등원을 거부했다. 대학가와 중·고등학교까지 학생들의 규탄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주요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일부 학교에서는 조기 방학을 해야 할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다.
야당의 기세와 부정선거 규탄 여론에 당황한 집권 여당은 15~20개 의석을 자발적으로 내놓겠다는 등의 수습책을 제시했다. 신민당 오션파라다이스예시 대변인을 맡고 있던 김대중은 당 총재인 유진오 박사에게 여당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강력히 요청했다. 그리고 이참에 지방자치제 실시 약속을 받아낼 것도 건의했다. 유 총재는 이에 긍정적이었고, 김대중은 당 대변인 자격으로 여당 제안을 수용할 뜻을 밝혔다.
유진오(오른쪽) 신민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 당 총재가 안국동 자택에서 고여문(왼쪽) 사무처장, 김대중(가운데) 대변인 등 당직자들과 '대여투쟁'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러나 다음날 신민당 내 강경파는 여당의 제안을 거부하고 6‧8 선거의 전면 무효화와 재선거 요구를 내걸고 장외투쟁을 계속하기로 했다. 강경파의 명분론에 실리를 취하자는 목소리가 밀린 것이다. 하지만 여야의 대치가 길어지자 국민 여론은 양측을 가리지 않고 국회의 무책임을 질타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결국 야당은 여당이 제시한 타협안을 받아들여야 했는데, 그 내용은 보잘 것 없었다. 부정선거에 대한 대통령 사과는 유감 표명으로 대신했고, 부정이 심했던 선거구의 재선거 등은 국회 내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처리한다는 정도에 그쳤다. 야당은 선거 후 174일, 약 5개월 만에 등원해 국회를 정상화했다(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1’).
"15~20개 의석 내놓겠다"는 공화당...김대중은 받아들이자 했으나 강경파 반대
공화당은 부정선거 뒤처리로 10명을 제명 조치했다. 공화당에서 제명된 의원들 가운데 1명은 의원직을 내려놓고 정계를 은퇴했지만, 나머지는 ‘10‧5구락부’를 결성해 활동하다가 3선 개헌 국면의 어수선한 시기에 은근슬쩍 민주공화당으로 복당했다.
신민당이 김대중의 의견대로 15~20개 의석을 내놓겠다는 공화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상황은 신민당에 훨씬 유리해졌을 것이다.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강경한 것이 겉으로는 선명해 보이지만 때로는 한없이 무책임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김대중, 앞의 책).
부정선거 문제에 대한 박정희의 입장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거 4일 후인 6월 12일, 박정희는 정일권 국무총리와 김종필 공화당 의장에게 “얼마간의 의석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공화당원에 의해 저질러진 선거부정 사건은 엄격하게 다스려야 한다”면서 철저한 사후 처리를 지시했다. 6월 16일에는 특별 담화를 통해 “선거 부정은 마땅히 규탄 받아야 하며, 민주 시민은 이를 규탄해야 한다”, “정부도 국민과 함께 이를 분개하고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조갑제, ‘박정희 9’).
박정희 "흑색선전 속임수로 선거 치르는 사람 있다"
법조인 출신으로 민주공화당 창당 과정에 참여해 초대 총재를 지냈던 정구영의 회고록 ‘실패한 도전’에는 6‧8 부정선거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부정선거 사태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수습책을 건의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다.
정구영 전 공화당 총재. 그는 회고록에서 부정선거로 얼룩진 1967년 7대 총선과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이 몇몇 사람이 국회에 들어오지 못하기를 바라서 그 지역의 공화당 후보를 특별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공개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제가 이번 선거에서 몇 사람은 국회에 들어오지 못하기를 바라서 특히 그 지역의 공화당 후보를 특별 지원했습니다. 그 몇 사람은 내게 반대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6대 국회 4년 동안 보니 그 사람들은 이면에서 뒷거래 등을 통해 실속을 챙깁니다. (중략) 소위 마타도어 작전이라 해서 속임수 선거를 도처에서 했습니다. 김○○ 같은 사람이 한 선거운동은 온통 마타도어 흑색선전입니다.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잔꾀와 속임수로 선거를 치릅니다.”
(‘정구영 회고록-실패한 도전’, 이영석 편, 중앙일보사, 1987)
박정희가 ‘국회에 들어오지 못하기를 바라서’ 그 지역의 공화당 후보를 특별 지원한 ‘그 몇 사람’ 중에는 김대중도 포함됐다. 특히 ‘온통 마타도어 흑색선전’이라고 한 부분은 명백히 김대중을 겨냥한 것이다.
중앙정보부, '선거판의 여우'로 불린 김대중 비서 회유해 배신하도록 만들다
김대중의 마타도어 흑색선전 선거운동 배경에는 엄창록이라는 인물이 있다. 함경북도 경성군 태생인 그는 6‧25 전쟁 와중에 월남해 강원 인제에 정착해 살다가 1961년 인제 보궐선거 당시 김대중의 비서로 합류했다. 이후 신출귀몰한 꾀로 인제 보선, 1963년 6대 총선(목포), 1967년 7대 총선(목포)에서 김대중 당선에 공을 세웠다. ‘선거판의 여우’라고 불린 그는 집권여당의 관권·금권 선거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마타도어 흑색선전과 같은 술책이 불가피하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김대중의 비서로 '선거판의 여우'로 불렸던 엄창록. 그는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중앙정보부의 회유를 받아 김대중 곁을 떠났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당시 중앙정보부가 엄창록의 선거술책을 수집해 소책자를 만들어 은밀히 돌려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중앙정보부는 엄창록을 김대중 곁에 두고 선거를 치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집중적으로 회유해 김대중을 배신하도록 만들었다. 1971년 대선 과정에서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지역감정 조장이 극심했는데, 권노갑 등 김대중 측 참모들은 여권으로 넘어간 엄창록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했다(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폴리티쿠스, 2012).
정구영 회고록에서 보듯 김대중에 대한 박정희의 부정적 인식은 7대 총선을 거치면서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이 3선 개헌 반대운동에 앞장서자 그에 대한 박정희의 부정적 인식은 더욱 굳어졌을 것이다.
박정희는 7대 총선 당시 김대중 후보가 3선 개헌 가능성을 거론하자 단호하게 부인한 바 있다. 1968년 청와대에서 신민당 김상현 의원과 단독 면담을 하는 자리에서도 3선 개헌 등 장기집권 문제가 나오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내가 장기 집권을 하거나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한다면 야당이 극한투쟁을 해도 좋습니다. 내 임기가 3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만약 장기 집권한다면 김 형이 극한투쟁에 앞장서시오.”(조갑제, 앞의 책)
3선 개헌 둘러싼 공화당 내 권력투쟁
박정희의 이런 입장과는 달리 3선 개헌 추진 움직임은 1966년 1월 공화당 당직 개편에서 반JP(김종필) 4인 체제가 들어서면서 시작됐다는 견해가 많다. 4인 체제는 김성곤 국회 재정위원장 겸 당 재정위원장, 길재호 사무총장, 백남억 재정위원장, 김진만 원내총무 등을 일컫는다. 이들은 2차 외유 직전 공화당 의장직에서 물러난 지 1년 6개월 만에 다시 당의장으로 복귀한 김종필을 집중 견제했다. 3선 개헌 없이 1971년에 대선이 치러진다면 김종필이 가장 유력한 공화당 후보였고, 여권 내 3선 개헌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김종필(왼쪽) 국무총리가 백남억(오른쪽) 공화당 의장과 대화하고 있다. 이 두사람은 3선 개헌을 두고 공화당 내에서 서로 대립하게 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68년 5월에는 김종필이 국회의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을 포기하고 물러나게 된 ‘한국국민복지회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앞서 언급한 4인 체제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 포함된 ‘6인방’이 공동으로 꾸민 작품이었다. 내용은 김종필 측근인 김용태 의원이 사조직을 만들어 ‘박정희 3선 개헌 공작을 저지해야 하며 1971년 대선에서 우리의 대안은 김종필이다’라는 시국판단서에 서명했다는 것이었다. 김종필은 청와대로 두 차례 찾아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해명했지만, 박정희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보고서를 내밀며 진상을 추궁했다고 한다(김종필, ‘김종필 증언록’, 와이즈베리, 2016).
결국 이 사건으로 김종필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칩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화당 내에서는 3선 개헌을 추진하는 당 지도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구영 의원을 중심으로 한 구주류는 개헌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세력을 규합했고, 이른바 ‘4‧8 항명’으로 실력을 드러냈다. 야당이 제출한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 표결에서 공화당 의원 40명이 찬성표를 던져 가결된 것이다. 이는 박정희 집권 이후 최초의 집단적 항명 사태였다.
김종필 불러 "3선 개헌 도와달라" 호소한 박정희
공화당은 개헌 반대파의 핵심으로 항명을 주도한 양순직·예춘호·박종태·정태성·김달수 의원 등 5명을 제명했다. 그럼에도 공화당 내 3선 개헌 반대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박정희는 칩거 중인 김종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김종필을 청와대로 불러 “임자밖에 없어. 임자가 날 도와야지 누가 날 도울 거야. 날 도와주고 조금 남은 일 더 하게 해줘. 이번 한 기만 더 하겠다는 건데, 그것도 안 되겠어?”라고 호소했다. “같이 죽자고 혁명 해놓고, 혼자 살려고 그래? 1960년대엔 빈곤을 겨우 퇴치했는데, 1970년대엔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할 것 아니야. 이 길을 같이 가자”고도 했다. 김종필은 “대통령의 눈에 눈물까지 글썽였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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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
① 자유당의 방해로 후보 등록 실패...분노한 김대중은 박정희의 부대를 찾아갔다
② "김대중은 공산주의자" 흑색선전 뚫고 첫 당선...그러나 이틀 뒤 쿠데타가 일어났다
③ 박정희 유신 선포 때 일본 머물던 김대중…1년 전의 교통사고로 체포·고문 면했다
④ "실로 나라가 위중합니다" 김대중의 간곡한 제안, 박정희는 끝내 거절했다
⑤ 김대중 “내 어머니는 둘째부인”…누나 젖먹고 큰 ‘늦둥이’ 박정희
⑥ 체구 작았지만 공부 잘한 '악바리'...박정희는 나이 많은 급우들의 뺨도 때렸다
⑦ 성적 ‘꼴찌그룹’ 박정희와 대학 진학 포기한 김대중…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⑧ 물에 빠진 여학생 구한 교사 박정희...목포서 지프 몰던 사업가 김대중
⑨ 나이 많아 만주군관학교 입학할 수 없었던 박정희...혈서를 써보냈다
⑩ 전쟁 탓에 목포 떠나 부산에서 사업한 김대중, 그곳에서 대학생 이희호 만나다
⑪ 박정희·김대중 모두 좌익으로 몰렸던 이유는...1946년 대구의 그날
⑫ 박정희가 추진한 한일국교정상화...'변절자'로 몰렸지만 "필요하다" 소신 밝힌 김대중
⑬ "반드시 낙선시켜라" 박정희 엄명이 '정계 거물' 김대중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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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