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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이제 양산과 경계를 이루고 김해를 감싸 안으며 6시 방향으로 내려간다.
김해는 '가락국(금관가야)'이 있던 땅이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서 '가락국이 여뀌잎처럼 좁아서 농사를 지을 만하지 않다'라고 기술했다. 가락국은 농업이 국부 전부였던 시절, '쇠를 다루는 기술'과 국제무역을 통해 부강한 나라로 성장했다. 김해(金海)는 '철의 바다'라는 뜻이다. 가야에서 만든 덩이쇠는 농기구 등 각종 철제품의 원재료로 사용되었다. 품질도 좋았지만, 크기나 모양이 일정해 화폐처럼 통용되기도 했다. 금관가야는 서쪽의 백제, 동쪽의 신라는 물론 낙랑, 중국, 일본과도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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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는 1600년 전 척박한 영토적 한계를 극복하고,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한 '중계무역'을 통해 국제적인 위상을 확보했다. 21세기 글로벌 물류 허브인 지금의 싱가포르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바다와 연결되지 않는 내륙이 되어버린 현재 김해로서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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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의 덩이쇠와 일본에서 들어온 바람개비 모양의 청동 장식품. /김석환
해상왕국 금관가야의 왕도 김해는 낙동강을 통해 내륙으로 이어지고, 바다를 통해 중국∙일본과 연결되는 국제적인 무역항이었다. 좋은 항구의 조 바다이야기온라인 건은 산업혁명 전후가 확연히 다르다. 산업혁명으로 증기선이 등장한 이후에는 덩치가 커진 배가 드나들기 쉬운 수심이 깊은 곳이 좋은 항구로 꼽혔다. 현재 부산과 같은 곳이다. 가야 시절에는 기준이 달랐다. 밀물 때 내륙 깊숙이 들어와 드넓은 갯벌 위에 짐을 내리고, 썰물이 들면 배를 다시 띄울 수 있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항구가 양항이었다. 김해평야가 모두 오션파라다이스예시 바다였던 시절, 금관가야는 내륙 깊숙이 들어온 천혜의 만(灣)을 끼고 있었다. 고김해만(古金海灣)에 입항한 무역선들은 조만강(潮滿江)과 해반천(海畔川)을 따라 왕성 부근까지 이를 수 있었다. 함안의 아라가야, 창녕의 비화가야도 육지 깊숙이 들어온 내만(內灣)과 낙동강과 남강의 수로가 성장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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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김해만 추정도. /김석환
국제무역과 해상왕국은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배를 만드는 기술과 운항 능력도 있어야 하지만, 해적과 주변 국가로부터 교역품을 지키는 강력한 무력집단도 필요했다. 금관가야는 이른 시기부터 철제 갑옷을 착용한 기병 부대가 있었다. 기병은 유지비가 많이 드는 고급 병종이지만 금관가야는 이를 감당할 만한 부유했다.
무기도 다양했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헌터스>에서 주인공 미라가 사용하는 곡도(曲刀)는 고분군에서 출토된 가야 시대 철제 곡도를 모티브로 했다. 당시 일본 무장은 나무나 가죽으로 된 갑옷에 짧은 칼과 창 수준이었다. 이 시기 왜가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무기 수준만 비교해봐도 허구임을 알 수 있다.
금관가야 전성기는 3~4세기였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서기 400년 5만 명의 대군을 보내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을 함락시킨다. 당대 동아시아 최강 수준이던 고구려군 주력은 사람과 말이 모두 철갑을 두른 중장기병이었다. 중장기병인 '개마무사(鎧馬武士)'에게 함락된 '종발성'은 지금 김해로 추정된다. 이후 금관가야는 해상교역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532년에는 신라에 항복하게 된다. 낙동강 중상류에서 흘러온 흙들이 하류에 쌓이면서 항구가 기능을 잃어간 것도 쇠락의 또 다른 이유였다. 서기 42년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고 김해 구지봉(龜旨峯)에서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자 하늘에서 '알'의 형태로 내려와 깨어난 김수로왕이 나라를 세운 지 490년 만이었다. 수로왕은 6년 뒤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허황옥과 결혼한다. 기록대로라면 수로왕이 6살, 허황옥이 16살이었다. <삼국유사>는 수로왕과 허황옥은 모두 157살까지 살았다고 쓰고 있다.
수로왕과 허황옥의 결혼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일까? 논의는 크게 3가지로 정리된다. 허황옥이 실제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설, 아유타 출신의 허황옥 일족이 중국 사천성 보주(普州)에 정착해 살다가 김해로 왔다는 설, 서로 다른 부족 간의 결합을 신화적으로 서술한 것이라는 설 등이다.
아유타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인도 북부 내륙의 아유디아, 남인도의 칸야쿠마 설, 태국 아유티아 등 여러 주장이 있다. 2000년 전에 인도에서 김해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했겠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에도 허황옥 도래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쪽의 근거는 아유타국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쌍어문(雙魚紋)이었다.
수로왕릉 정문에 그려진 쌍어문. /김석환
수로왕릉 정문에는 탑을 사이에 두고 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 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수로왕릉의 건축물은 조선 정조 시기인 18세기에 지어졌다. 이때 그려진 쌍어문 그림이 가야 시대부터 있었다는 증거도, 쌍어문이 1세기 무렵 인도 아요디야 지역의 상징이었다는 증거도 없다. 아요디아의 쌍어문 문양은 18세기 이후 건축물인 지역 영주의 성문 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인도학 전공자인 이광수는 <인도에서 온 허황후, 그 만들어진 신화>라는 책에서 아요디아라는 도시는 5세기 이전에는 심지어 존재조차 없었다고 지적한다. 이광수는 허황옥 이야기는 삼국통일 이후 몰락한 김유신계 가문이 만들고 남방 불교설을 주장하는 쪽이 전파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허황옥이 가져왔다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를 한다.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의뢰로 고려대 산학협력단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파사석탑의 재질은 한반도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일본 동부, 중국 복건성 등 동남부, 베트남 등이 주산지였다.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까지가 신화일까? 그래서 가야는 신비의 왕국인가보다.
돌에 보랏빛 무늬가 보이는 파사석탑. /김석환
낙동강은 이제 하구를 향해 내쳐 달린다. 낙동강은 국내 최대 삼각주인 명지도(鳴旨島) 위쪽에서 두 가닥으로 나뉘어 흐른다. 금관가야 시절은 물론 20세기 초까지 낙동강의 본류는 김해를 둘러싸고 흐르는 서낙동강이었다. 낙동강 수운의 중심도 서낙동강이었다. 서낙동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오봉산(五峰山)이다. 나지막한 언덕 같은 해발 47.5m의 오봉산에 오르면 서낙동강의 모습이 확연하게 보인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오봉산 정상에 왜성을 건설했다. 죽도는 임란 당시에는 김해만 한가운데에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고, 바다를 통해 남해안의 가덕도와 안골포, 웅포, 거제도 등과도 연락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오봉산 죽도왜성에서 바라본 서낙동강. /김석환
'(죽도 왜성은)높고 웅장한 누각에, 넓이는 평양 정도, 규모는 만여 명의 군사가 수용 가능', 임진왜란 3년 뒤인 1595년 2월의 <실록>에 기술될 정도의 규모였다.
1593년 7월 죽도 왜성을 축성한 것은 일본 규슈 사가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였다. 나오시마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함경도까지 진군해 선조의 두 아들인 임화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은 장수이다. 그는 전투가 없거나 강화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죽도 왜성에 머물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나베시마는 조선의 도공들을 대거 납치해간다. 죽도왜성은 도공들이 수용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고, 일본으로 가는 출발지였다. 김해 출신으로 추정되는 '일본 도자기의 어머니' 백파선(百婆仙) 일행도 그렇게 끌려갔을 것이다.
흙의 선택, 가마의 온도 유지, 착색 등을 거쳐 도자기를 만드는 것은 당시에는 최고급 기술이었다. 끌려간 도공들은 아리타를 비롯해 규슈 곳곳으로 흩어져 도자기를 만들었다. 조선에서 천민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사무라이급 대우를 받으며 성(姓)도 하사받았다. 이들이 만든 도자기는 17세기 중반에서 18세가 중반까지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영주들은 도자기 수출대금으로 대포와 군함 등 서양의 최신 무기를 사들였다. 이렇게 무장을 강화한 규슈의 혁명군은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이라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서구식 근대화와 제국주의 길로 나아간다. 이토 히로부미, 사이고 다카모리, 이노우에 가오루 등 규슈 출신들은 그 여세를 모아 조선을 식민지로 편입한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가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수단이 된 것이다.
아리타에서 처음 도자기를 만든 이삼평을 모신 신사. /정영석
더 돌이켜보면 임진왜란도 마찬가지였다. 철포와 군선 제작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의 원천은 1526년 발견된 규슈 이와미(石見) 은광이었다. 당시 일본은 원시적으로 은광석을 채굴한 뒤, 은광석을 싣고 조선에 와서 '회취법(灰吹法)'이라는 선진 기술로 제련해 돌아갔다. 박종인의 <대한민국 징비록>에 따르면 이와미 은광 발견 7년 뒤인 1533년 일본은 2명의 조선인 기술자를 초빙해 기술을 도입했다. 그 이후 17세기 초가 되면 일본의 은 생산량은 세계의 1/3에 이른다. 임란 당시 일본은 전쟁 비용이 충분한, 은이 넘쳐흐르는 나라였다.
일본과 7년 전쟁을 치렀던 조선 선조는 전쟁 직후인 1600년 선조는 단천 은광을 폐쇄하며, 은을 캐다 걸리면 엄벌하겠다고 선언한다. 조선은 기술이나 산업 대신 성리학이라는 낡은 이념에만 매달렸다. 그 후과는 몇백 년 뒤 식민지로의 전락이었다. 역사는 그렇게 비정하다.
/김석환 박사·지식 큐레이터
☞ 필자는 KNN 사장, 한국인터넷진흥원장,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고인돌과 인공지능'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언론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며 콘텐츠와 한국 언론기업의 문제에서부터 산업혁명 이후 헤게모니를 둘러싼 세계와 한국의 근현대사, 생성형 인공지능, 플랫폼, 빅데이터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다.
김해는 '가락국(금관가야)'이 있던 땅이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서 '가락국이 여뀌잎처럼 좁아서 농사를 지을 만하지 않다'라고 기술했다. 가락국은 농업이 국부 전부였던 시절, '쇠를 다루는 기술'과 국제무역을 통해 부강한 나라로 성장했다. 김해(金海)는 '철의 바다'라는 뜻이다. 가야에서 만든 덩이쇠는 농기구 등 각종 철제품의 원재료로 사용되었다. 품질도 좋았지만, 크기나 모양이 일정해 화폐처럼 통용되기도 했다. 금관가야는 서쪽의 백제, 동쪽의 신라는 물론 낙랑, 중국, 일본과도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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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의 덩이쇠와 일본에서 들어온 바람개비 모양의 청동 장식품. /김석환
해상왕국 금관가야의 왕도 김해는 낙동강을 통해 내륙으로 이어지고, 바다를 통해 중국∙일본과 연결되는 국제적인 무역항이었다. 좋은 항구의 조 바다이야기온라인 건은 산업혁명 전후가 확연히 다르다. 산업혁명으로 증기선이 등장한 이후에는 덩치가 커진 배가 드나들기 쉬운 수심이 깊은 곳이 좋은 항구로 꼽혔다. 현재 부산과 같은 곳이다. 가야 시절에는 기준이 달랐다. 밀물 때 내륙 깊숙이 들어와 드넓은 갯벌 위에 짐을 내리고, 썰물이 들면 배를 다시 띄울 수 있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항구가 양항이었다. 김해평야가 모두 오션파라다이스예시 바다였던 시절, 금관가야는 내륙 깊숙이 들어온 천혜의 만(灣)을 끼고 있었다. 고김해만(古金海灣)에 입항한 무역선들은 조만강(潮滿江)과 해반천(海畔川)을 따라 왕성 부근까지 이를 수 있었다. 함안의 아라가야, 창녕의 비화가야도 육지 깊숙이 들어온 내만(內灣)과 낙동강과 남강의 수로가 성장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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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과 허황옥의 결혼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일까? 논의는 크게 3가지로 정리된다. 허황옥이 실제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설, 아유타 출신의 허황옥 일족이 중국 사천성 보주(普州)에 정착해 살다가 김해로 왔다는 설, 서로 다른 부족 간의 결합을 신화적으로 서술한 것이라는 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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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죽도왜성에서 바라본 서낙동강. /김석환
'(죽도 왜성은)높고 웅장한 누각에, 넓이는 평양 정도, 규모는 만여 명의 군사가 수용 가능', 임진왜란 3년 뒤인 1595년 2월의 <실록>에 기술될 정도의 규모였다.
1593년 7월 죽도 왜성을 축성한 것은 일본 규슈 사가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였다. 나오시마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함경도까지 진군해 선조의 두 아들인 임화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은 장수이다. 그는 전투가 없거나 강화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죽도 왜성에 머물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나베시마는 조선의 도공들을 대거 납치해간다. 죽도왜성은 도공들이 수용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고, 일본으로 가는 출발지였다. 김해 출신으로 추정되는 '일본 도자기의 어머니' 백파선(百婆仙) 일행도 그렇게 끌려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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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에서 처음 도자기를 만든 이삼평을 모신 신사. /정영석
더 돌이켜보면 임진왜란도 마찬가지였다. 철포와 군선 제작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의 원천은 1526년 발견된 규슈 이와미(石見) 은광이었다. 당시 일본은 원시적으로 은광석을 채굴한 뒤, 은광석을 싣고 조선에 와서 '회취법(灰吹法)'이라는 선진 기술로 제련해 돌아갔다. 박종인의 <대한민국 징비록>에 따르면 이와미 은광 발견 7년 뒤인 1533년 일본은 2명의 조선인 기술자를 초빙해 기술을 도입했다. 그 이후 17세기 초가 되면 일본의 은 생산량은 세계의 1/3에 이른다. 임란 당시 일본은 전쟁 비용이 충분한, 은이 넘쳐흐르는 나라였다.
일본과 7년 전쟁을 치렀던 조선 선조는 전쟁 직후인 1600년 선조는 단천 은광을 폐쇄하며, 은을 캐다 걸리면 엄벌하겠다고 선언한다. 조선은 기술이나 산업 대신 성리학이라는 낡은 이념에만 매달렸다. 그 후과는 몇백 년 뒤 식민지로의 전락이었다. 역사는 그렇게 비정하다.
/김석환 박사·지식 큐레이터
☞ 필자는 KNN 사장, 한국인터넷진흥원장,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고인돌과 인공지능'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언론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며 콘텐츠와 한국 언론기업의 문제에서부터 산업혁명 이후 헤게모니를 둘러싼 세계와 한국의 근현대사, 생성형 인공지능, 플랫폼, 빅데이터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다.

